김미정.

 순간 그런 이름이 대학 동창 중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김미정이란 사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지, 어디서 나타난 서사에 젖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왜 김미정 행세를 했을까.

*

 문이 열립니다, 하는 기계음이 들리자마자 지하철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지친 눈으로 빈자리를 물색하는데 반대편 의자 끝 쪽에 낯선 얼굴이 하나 있었다.

 미정이.

 미정인가.

 미정이었다.

 눈 밑에 점. 미정이는 눈 밑에 점이 하나 있었다. 미인 점이라고 다들 부러워했었던 점이 있는 걸 보니 미정이가 맞다. 아니, 아닌가. 미정이는 저런 호피 무늬 셔츠를 즐겨 입진 않았던 것 같은데. 혹 내가 몰랐던 미정이의 취향이 있을 수도 있고, 긴 세월 동안 취향이 변했을 수도 있으니.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호피 무늬 셔츠를 선물 해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취향은 아니지만 한번 입어본 것일 수도 있겠다.

 대학 동창이었던 미정이는 밝고 싹싹한 성격으로, 어디서든 할 일을 곧잘 찾아내 하던 모습에 은근하게 좋아하고 응원했던 친구였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궁금해했었던, 그렇다고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서 친구들에게 직접적으로 그 아이 이름을 꺼내며 묻지는 않았던 친구.

 오랜만에 그때를 떠올리자니 푸릇했던 시절이 그리워져 마음이 짜르르했다. 그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눈코뜰새 없이 재밌는 일들이 솟구쳤고, 사소한 만남 하나에도 마음이 들떴었다.

 마음이 다시 한번 짜르르 하더니 용기가 솟았다. 만원 지하철 틈새를 비집고 미정이라고 추측되는 여자 앞에 섰다. 여자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흘끗 바라보는가 싶더니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그 틈을 타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 혹시 미정이니?

 여자가 곧 화색을 띄며 알은 체를 했다. 응, 그래 현아야. 하고.

 우리는 같은 박자를 타고 흔들거리며 몇 문장을 주고 받았다. 잘 지냈느니, 세월이 참 빠르다던지, 요즘 날씨가 참 애매하다던지 따위의 얘기를 멋쩍은 웃음과 함께 회색 공기 중으로 흩뿌렸다. 그 사이에는 마침 서로 같은 역에서 내린다는 정보가 끼어있었다. 우리는 이수역에서 내려 나는 집으로, 미정이는 직장 선배를 만나러 갈 참이었다. 이수역을 두 정거장 남겨놓았을 때, 이렇게 헤어질 게 아니라 잠깐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떠냐고 미정이가 물었다. 약속시간 전에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나는 데다, 근처에 플랫화이트를 고소하게 내리는 카페를 하나 안다고.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잠시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나의 가슴은 말랑이며 뛰었고, 마주 앉은 미정이의 눈은 내가 그를 잔뜩 동경했던 시절처럼 반짝거렸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일하는 내내 커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한 날이었기에, 고소한 플랫화이트도 나의 마음을 뛰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

 우리는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밀고 들어가 다시 마주 보고 앉았다. 미온한 오후 여섯 시의 햇살 아래서 다시 본 미정이는 그때와 더욱 똑같은 모습이었다.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 대학생 미정이와 대학가 근처 카페에 들어 앉은 것만 같았다. 그때 미정이와 친했다면 이런 모습이었겠지. 김 교수님 뒷담화를 하고, 시험 평가 방식에 불평을 토하고, 봄 축제에 초대했음직한 연예인을 주제로 토론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윤호 오빠 얘기를 들추며 꺄르르 웃다가, 웃음을 그치는 동시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번씩 빨아들이는.

 미정이는 작은 출판사에서 마케팅과 편집부를 겸하고 있다고 했다. 전공을 살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 미정이는 그래서인지 그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빛났다. 바쁘지만 꿈 꿔왔던 일을 하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자랑스럽다고 얘기했다.

 그런저런 얘기를 막 시작했는데 삼십 분이 그새 흘렀고, 우리는 아쉬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뜨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의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 년 전의 나를 회상했다. 문득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으로 미정이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삼십 분은 우리의 빈 시간을 온전히 나누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그렇게나마 미정이의 흔적을 더 훔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미정이를 온라인 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 함께 아는 지인들을 모조리 검색해보아도 ‘김미정’만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오랜만에 봤음에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정신없이 떠드느라 그 흔한 번호 교환조차 못했다는 사실에 난감해졌다. 우리가 만난 오늘을 떠올리거나, 대학생 시절의 추억을 이어줄 수 있는 아무런 교점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렸다.

 그래서 그냥 오늘 본 얼굴을 최대한 기억하자고, 마주 앉은 미정이의 얼굴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눈… 코… 입… 눈 밑에 미인점… 방금까지 봤던 얼굴인데도 미정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스산한 기운이 스쳤다.

 내가 누굴 떠올리고 있었지?

 방금 전까지도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 애잔한 느낌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게 다였다. 혼자 대학생 시절 향수를 그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무의식에서 사무치게 그리워한 날들이 만들어 낸 허구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은 정거장을 멍하니 지나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