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영은 모든 면에서 느렸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한 세월이었고, 간단한 질문에 대답할 때조차 오래 뜸을 들이곤 했다. 처음 영을 알게 된 사람은 답답하다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친구였던 시절까지 합치면 거의 8년간 영의 곁에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짜잔.

 -너… 이게 뭐야?

 조수석 차 문을 열자 눈앞에서 꽃다발을 든 손이 수완을 반겼다. 수완이 좋아하는 데이지 꽃이었다.

 수완은 얼떨떨하게 꽃다발을 받아들고 차에 올라탔다. 그러곤 급하게 D-Day 앱을 켰다. 혹시 오늘이 기념일인 걸 놓쳤나? 하지만 화면에 뜬 숫자는 2276. 기념일이라기엔 애매하기 그지없는 숫자였다. 열심히 기억을 끄집어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고, 특별히 의미 있는 날 같지도 않았다.

 영은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수완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 날도 아니야. 그냥 오는 길에 예뻐서 샀어.

 그제서야 수완은 안심한 듯이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영이 조금 오글거리긴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영은 미리 예약한 식당으로 수완을 데리고 갔다. 비프 부르기뇽과 양파 수프를 파는, 수완이 가보고 싶어 저장해 두었던 프랑스 가정식 식당이었다. 식사와 서비스까지 수완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영은 자랑스럽게 후식을 먹을 카페도 알아왔다며 안내했다. 주차할 곳이 없어 땡볕에 카페가 위치한 골목까지 올라가야 했던 것이 흠이긴 했지만. 영은 수완의 손을 잡아끌어주었고, 투정도 덤덤히 받아주었다.

 도착한 카페에서는 빙수를 주문했다.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자 얼음의 사각거림, 직접 쑨 팥의 적절한 당도와 식감, 바삭바삭 씹히는 시리얼과 한 스쿱 올라간 딸기 아이스크림이 어우러져 환상의 하모니를 만들었다. 함께 옛날 빙수의 훌륭함을 칭찬하며 나누는 행복한 감정까지도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어떤 것보다도 좋았던 건, 영의 태도였다. 수완은 영과 진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핸드폰을 만지작대거나 먼 산만 쳐다보며 무신경하게 흘려보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영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영은 수완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었고, 정성껏 대답도 했고, 질문도 하며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완은 실로 오랜만에 영과 같은 시간 위에 놓여있는 기분을 느꼈다.

 느지막이 들어간 술집에서는 두 사람의 지난 추억 얘기들을 많이 했다. 수완은 그것이 너나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좋았다.

 영은 수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차에서 내려 공동 현관 바로 앞까지 배웅했다. 그러고는 아직도 뭔가 남아있는 사람처럼 미적거리면서 시간을 끌었다.

 수완은 영의 손을 만지작댔다.

 -나 오늘 진짜 행복한데, 기분이 좀 이상해.

 수완은 그날의 데이트가 마치 꿈같다고 느꼈다. 데이트가 다 끝나고도 헤어지기 아쉬워 발을 떼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데이트였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연애 초기의 감정이었다.

 영이 수완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그런데 수완은 왜 문득 그 말이 ‘미안해’로 들렸던 걸까?

 주머니 속 영의 핸드폰이 수차례 울렸다.

 그 뒤로도 영의 다정함은 계속되었고 수완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주기적으로 사오는 꽃다발에도, 수완의 생각이 났다며 건넨 목걸이에도, 과하게 느껴질 정도의 배려와 친절함에도 이렇다 할 계기가 없다는 게 걸렸다. 영이 바뀌게 된 계기. 수완은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영은 어째서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걸까? 수완은 연애 초와 달라진 영의 모습에도 서운함을 토로한 적이 없었고, 그것 때문에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펄펄 끓던 물도 미지근해지기 마련이라고, 연애의 온도도 마찬가지라고 수완은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엔 사소한 다툼이나, 언쟁, 유치한 사랑싸움이 거의 드물었다.

 아, 그래서려나. 너무 뭐가 없었나.

 수완은 영의 변화에 자신은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을 거란 본능적인 예감을 느꼈다.

 그때 수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었다. 질투가 많아 재밌다고 했던 영의 학교 후배, 배울 점이 있어 존경스럽다는 회사 동기, 영이 유일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말한다는 오래된 친구. 그중 누구일까. 영은 누구에게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그 주인공을 알아내는 법은 간단할 터였다. 데이트 중에 수시로 울리는 영의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수완은 그러지 않았다.

*

 그러지 못했다. 영이 내게 건네는 호의가 이제까지 못해준 것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영이 나와의 관계를 빠르게 정리하지 못하고 잘해주는 건, 오래 껴안고 있어 꼬질꼬질해진 인형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내 처지가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인형은 제 발로 걸어갈 수가 없다. 주인의 마음이 떠난 걸 알고 있어도 그저 제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니 관계를 정리하는 건 영의 몫이어야 했다.

 그러나 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며칠째 내게 잘해주면서 헤어질 때쯤 씁쓸한 표정만 남기고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느린 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다르겠지.

 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

 어김없이 만족스러운 식당과 사랑스러운 카페, 전과는 다른 영의 분위기, 태도. 특별한 정성으로 포장된, 결말에 가까워지는 데이트. 중간중간 붕 뜨는 공기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하지만 영은 아직도 생각을 정리 중인 건지, 아니면 흔들리고 있는 건지.

 -입에 뭐 묻었다.

 영이 손을 뻗어 내 입 주변을 닦았다. 잘 해주지 마. 미안한 거, 그거 사랑 아니야. 금세 다른 사랑 시작해도 뭐라고 안 할게. 그러니까 질질 끌지 말고 그냥 빨리 가라. 제발 그렇게 다해줄 것처럼 웃지 좀 말고…

 도착한 집 앞. 영은 또 망설인다.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슨 말이 나와야만 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말이 ‘사랑해’이길 바라는 나도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