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서로를 철저히 친구라는 규정 안에서 다루고 묘사했다. 하지만 내심 알고 있었다. 얄팍한 언어 밖으로 흘러넘친 마음이 아주 많다는 것을.

나는 욕망을 드러내는 일에 늘 어색했다.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고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기가 죽도록 어려웠다. ‘나는 죽고 주만 살리’ 식의 정신 교육을 날 때부터 받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교회는 “바라고 원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지만, 고작 몇 개의 고리타분한 항목만을 허용할 뿐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그들의 말을 꽤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졸업해 기독교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순종과 절제 끝에 진짜 자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근본적인 생각이 변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시점에 서아를 만났다. 아니다. 어쩌면 서아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아와는 새내기 시절 대학부에서 처음 만났다. 혼자 교회에 간 날에도 예배가 끝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서아가 곁에 있었다. 우리는 매주 예배가 끝나면 화장실 칸이나 계단실 같은 곳으로 단둘이 향하곤 했는데, 일주일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달뜬 서아의 표정이 퍽 자극적이었다. 우린 둘이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점점 더 일찍 자리를 떴다. ‘축도만 째자’에서 ‘설교 지루하지 않아?’가 됐다가, 예배 시작도 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갈래?’라고 묻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완전히 플라토닉했다. 으슥한 곳에 둘이 있어 봐야 새로 개봉한 영화나 과제, 미팅 같은 시답잖은 주제로 얘기하는 게 전부였다. 평일엔 따로 만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주일만큼은 취하지 않겠다는 서아의 고집 탓에 둘이 술 한 잔 마신 적 없었다. 다만, 그 애가 내게 어떤 계기가 된 것은 확실했다. 서아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점점 대담해졌다. 둘만의 관계를 벗어나 가족과 친구들, 세상을 향해 솔직한 마음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현, 나 니 글 읽어봤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서아가 말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 끼쳐왔다. 서아의 머리칼이 눈동자 주변에서 흔들렸다. 순간 내가 움찔한 탓인지, 아니면 누워있기가 불편했는지 서아는 몸을 일으켜 벤치에 도로 앉았다. 흰 반바지를 입은 내 허벅지 위로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이 남아 휘청거렸다.

“어쩌다가?”

나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학교 동아리 사람들과 만든 문집에 실은 글이었다. 딱히 주변에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가족이나 교회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줄 생각도 없었다.

“그냥, 너 인스타그램에 태그돼 있던데? 쓴다던 글이 그런 글인 줄 몰랐어”

“아… 응. 딱히 관심 가진 적 없었잖아”

더운 날씨 탓인지, 괜히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서아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수줍은 척 물었다.

“그게, 아무래도 좀 장황했지. 혹시 궁금한 건 없어? 어땠어?”

“아니 딱히, 근데 그런 생각은 왜 하게 된 거야?

그런 생각을 왜 하게 되었냐니, 질문을 너무 뭉뚱그린 탓에 서아의 말이 전방위적인 공격으로 느껴졌다.

낭패였다.

그 대화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아에겐 남자친구가 생겼다. 서아는 그 사람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나는 일요일마다 혼자 남겨졌다. 결국 나는 그해 겨울 교회를 떠났다.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새 공동체를 찾았다. 같은 일에 분노하고, 같은 뜻을 위해 힘을 모으는 사람들. 비슷한 미래를 꿈꾸는 이들. 처절한 외로움과 방황 끝에 만난 ‘우리’. 운 좋게 내 손으로 꾸릴 수 있었다. 다시 없을 천운이었다. 몇 년 뒤 그중 한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했고, 우리 집은 부모가 부여한 집단에서 탈락한 모든 이들이 쉬어가는 아지트가 되었다. 누구든 도망쳐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서아 안에도 나의 것과, 지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것과 같은 충동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의 방식을 지키며 안정감을 누리고자 했던 그의 욕구마저 이해한다. 한때는 우리가 하나가 될 줄 알았다. 붙잡은 손의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에게 단단히 결합해 같은 길을 걸을 줄 알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우리 둘은 갈림길 앞에서 만났다는걸. 서로를 사랑해 잠시 망설였으나,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는 것 또한.

이후에도 서아와는 종종 만났다. 이전만큼 대화가 즐겁진 않았다. 서아를 만나면 함께 비스듬히 서 있던 시절이 떠올라 괴로웠다. 완전히 쓰러져 거처를 옮긴 나와, 도로 꼿꼿이 선 서아. 의도한 적 없는, 합의되지 않은 무심한 이별. 어느새 서아는 예비 신랑에게, 나는 자매애의 너른 품에 안겨 있었다. 서아는 자주 공허했으나 안정감을 느꼈고, 나는 대체로 충만하나 항상 불안했다. 삶에 있어 모순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서아는 한순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다. 오직 그 사실만이 슬펐다. 내가 교회를 떠난 후에도 서아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나와 시간을 보내고 내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매주 만나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안부를 물었다. 새로운 추억을 쌓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날이 아주 길고 처량한 장례식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언젠가 한 번, 교회 수련회에서 서아의 발을 씻어준 적 있었다.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줬다는 일화를 모방한 행사였다. 나는 미지근한 물을 서아의 발에 끼얹으며 한 손으로 가만히 그의 발꿈치를 받쳤다. 손가락 끝이 발바닥에 닿자, 서아는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몸 너머로 부드러운 빛이 천천히 쏟아졌다. 서아를 따라 웃는 내 귓가에 목사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그랬듯, 서로의 발을 닦아 줘라. 여러분, 서로 사랑하셔야 합니다. 사랑, 오직 사랑입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