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음] ♩ ♪ ♬ 이번 역은 홍대입구, 홍대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우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캄캄했던 가방 속이 그 순간만큼은 눈부시게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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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닌지 노약자석에 앉은 아저씨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저씨는 책에 두었던 눈길을 이쪽으로 옮겼다. 눈빛에서 무심한 호기심이 읽혔다. 이 찰나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했듯이 아저씨는 눈앞으로 가져갔다. 앞자리에 서 있던 부자가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다.

 아저씨 손에 들려 아저씨의 집에 도착했다. 적적한 공기. 쾝쾝한 공기. 희끔한 대리석 식탁에 놓인 채 덜거덕거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옅끔한 대리석 식탁에 놓인 채 설그덕거리며 저녁을 먹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릇들이 물줄기에 철그덕거리며 샤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곤 세상이 어둑해져랬다.

 아침도 희끔한 대리석 식탁 그 자리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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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만 한 귀걸이를 단 키 큰 여자, 왼발 보폭이 조금 더 넓은 젊은 청년, 손녀의 손을 잡은 할아버지,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 체육복을 입은 중학생 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갔다. 가만히 매달려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찬 바람이 불어서 팔랑이는 정도가 다였다. 어둔 밤을 지나, 창창한 새벽을 맞이하고, 찌뿌듯한 아침을 기다려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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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분홍색 꽃무늬 가방을 멘 아줌마가 쥐어갔는데, 순식간에 옆에 있던 아이 손에 들려 있었다. 정수리와 발바닥이 만나고,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쳤다. 옆구리가 간질거렸다.

 온몸이 반듯하게 배배 꼬이고 나자, 간질거림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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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여자 손에 들렸다. 짙은 머스크향이 났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어딘가로 안착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소리 없이 숨죽여 있었다. 곧 배 언저리로 휴지 조각이 떨어졌다.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오래 향수 냄새를 맡고 있어 향이 옅어질 무렵이었다. 휴지 위로 포카리스웨트 병, 대일밴드 껍질, 이클립스 포장지, 영수증 뭉치까지 얼기설기 쌓이고 나서야 새로운 곳으로 옮겨졌다. 향수 냄새가 옅어진 휴지, 포카리 스웨트 병, 대일밴드 껍질, 이클립스 포장지, 영수증 뭉치와 모두 함께.

 얼마가 지났을까 처음 세상에 나왔던 날처럼 커다란 트럭에 실렸다. 덜거덩거리는 아스팔트의 느낌이 젊은 날의 그때를 상기시켰다.

 작은 충돌이 있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뜨거웠다.

 흰옷을 입고 매끈한 몸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꽁꽁 묶여 멀리멀리 이동하는 순간, 철컥철컥 소리를 내는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며 몸에 빨강 검정 노랑 잉크가 발리는 순간, 무거워져만 가는 배를 붙잡던 순간, 다시 트럭에 실렸던 오늘 밤까지가 짧은 파노라마로 스쳤다.

 순식간이었다.

***

 “다시 꼭 만나자.”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뱉어야 한다는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안다. 선배 종이들이 뱉은 약속의 의미를.

 선배 종이들과 헤어지며 눈물 콧물을 쏟았던 날은 후배 종이들에겐 매일 밤 자기 전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여느 날처럼 잘 준비를 하는데 한 종이 선배가 말했다.

 “우린 내일 여길 떠날 거야. 커다랗고 파란 트럭이 오면, 우린 이곳을 떠나 세상에 나갈 거야.”

 놀란 종이 후배들에게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종이 선배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먼저 세상에 나가 있을게. 어디로 갈지, 어떤 종이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꼭 우리 다시 만나자.”

 끝으로 갈수록 대장 종이 선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다음 날은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선배들은 정말로 커다랗고 파란 트럭에 몸이 실린 채 떠나갔다. 우리는 커다란 트럭이 작아지고, 파란색이 점점 검어지다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까지를 넋 놓고 보았다. 그제야 막내 종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참은 게 대견했다. 우리는 막내 종이의 울음소리에 포개 처음으로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

 유독 종이가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