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영에게, 라고 썼다가 지웠다. 내가 아는 해영이 진짜 해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람은 하나의 세계와도 같아서, 나는 그 사람이 밟은 땅의 단지 일부밖에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종종 무력하게 느껴지곤 한다. 해영은 더욱이 그랬다. 그 안에 떠안은 세계가 얼마나 넓고 아득한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나를 간혹 황홀하게 만들고 나를 자주 힘 빠지게 만들었다. 쉽게 말하면 곁을 많이 내주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그래서 얄밉고 사랑스러운. 나는 고민 끝에 편지 첫머리에 이렇게 고쳐 적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해영에게.

*

 너는 어느 날 사랑의 모양을 찾고야 말겠다며 떠났다. 그러나 그건 떠난 게 아니었다. 떠나지 않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머무르고, 도래하고, 비로소 안착할 수 있는 너만의 좌석에 대한 욕망을 차마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서울의 자잘하고 매연 섞인 눈이 싫어서 허리께까지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는, 최대한 낯선 곳으로 간다고 했다.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몇 달 전에 우리의 몇 안 되는 겹 지인에게서 너의 안위에 관한 짤막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저 아주 멀고 아주 생경한 곳에 있다는 것만 안다. 그게 참 미웠다. 네가 자꾸만 멀리 가는 게, 꼭 이 곳에서 가졌던 애정의 순간들과 충만했던 마음들이 실은 다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순간들에 그래도 함께였단 사실이 모조리 허무해져서.

 너는 그곳에서도 헤맬 거란 걸 알고 있다. 너는 사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줄곧 광막한 땅을 헤맬 거다. 사랑 비스무리한 것을 저버리고 되찾기를 반복하며 여기에서 저기로, 그곳에서 더 머나먼 곳으로. 네가 찾게 될 모양은 아마 사랑의 것은 아닐 거다. 본래 사람은 행복보다 슬픔에 더 가깝고, 이해보다 원망에 취약하며, 사랑보다 고독의 모양을 더 선명히 그릴 줄 안다. 너는 끝내 그릴 수 없는 사랑이 지닌 점과 선을 찾아 곳곳을 배회하겠지. 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해영은 그런 용기와 취약함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니까.

 나에게는 사랑이 쉬웠다. 그저 사랑하게 된 것을 사랑하면 되었다. 나는 내가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무조건 사랑받는 찰나에 여지없이 기대고 말았다. 그게 너무 안락하고 편안해서. 모든 게 다 조금씩 넘쳐서 버거운 게 아니라 모든 게 다 적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중독적이었다. 그래서 혼자가 된 나는 곧바로 유약해졌다. 그야말로 유약함을 내뿜듯이,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거울에 비친 내 외관이 점점 무르익어가는 것을 느낀다. 겉은 어른을 닮아가는데 속은 더 텅텅 비어간다. 그럴 때 내가 사랑했던 해영, 너를 떠올린다. 꼭 습관처럼 너를 미워한다. 어떤 때는 너를 동정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 잠시 내가 우위에 선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네가 미웠다. 그래서 나는 너를 마음껏 미워했다.

 그럼에도 해영 네가 무사하기를 바란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그곳에서 눈밭 위를 실수로 구르지 말고, 아프지 말고. 네가 지나온 인연들이 너의 삶에 그려놓은 울퉁불퉁한 궤적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사실 처음부터 눈치챘겠지만 내가 이 편지를 쓰려고 했던 이유는 너를 원망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떠나버린 너는 정말 이기적이었다. 아니, 정말 이기적이었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 네가 내 세상 안에서도 그렇게 평안하지 못했던 거라면 앞으로도 쭉, 어느 곳에서든 방황하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내 눈에도 못생겼다. 그래서 우선은 네가 무사하기를 빌어본다. 내가 조금은 덜 못생기고 싶어서.

 나는 네가 있는 곳을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거고. 처음부터 이 편지는 해영에게, 적어도 내가 아는 해영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었다. 너와 연락이 닿을 만한 길을 일부러 전부 끊어낸 지 오래였으니 어차피 보내지도 못할 편지였다. 네가 읽지도 않을 내용이라 저주나 실컷 퍼부을 작정이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사실 알고 있다. 너는, 결국은 반드시 행복해진다. 사람은 본래 행복보다 슬픔에 더 가깝지만서도, 어떻게든 행복은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너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삶의 모양이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느낄 거고 더는 헤매지 않을 거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은 그렇다.

 그러니까 해영, 너와 내가 모두 무사하기를 바란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