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뭘 어쩌라고?”

여진은 꽥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녹음된 음성을 수십 번 들은 후였다. 슬기가 사라졌다. 연락도 받지 않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지웠다. 찾아간 집엔 아무도 없었고, 얼마 전에 이사했다는 경비 아저씨의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스물다섯. 아직 자신을 다 알기엔 어린 나이였다. 친구와의 대화 없이는 어떤 마음도 지탱하지 못했으나, 말은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나가기만 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단단한 대화에 질투가 났다. 그래서 때로는, 모두가 함께 언어를 잃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도 마찬가지였다. 여진의 글은 기껏해야 틀에 박힌 ‘바른 말’ 좀 하고, 지켜지지 않을 혼자만의 선언을 하는 데 그쳤다. 삶에는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여진은 이 지점에서 상실감을 느꼈다. 생업으로 글쓰기를 꿈꾸기 전까지, 글은 온전히 ‘내 편’이었으니까.

여진은 대학 졸업 후 부모님께 애원해 일 년 간의 유예기간을 얻어냈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취업을 준비해야 할 시기였으나, 여진은 글을 쓰고 싶었다. 살면서 단 한 번, 총력을 다해 예술혼을 불살라 보겠다고 다짐했다. 꼭 어떤 글을 쓰겠다고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글이면 됐다. 길게는 신춘문예를 준비하며 중간중간 각종 문학상과 작사가 공모전, 웹소설 공모전, 시나리오 공모전을 기웃거렸다. 그리 많이 도전하지도 않았지만, 도전하는 족족 탈락했다. 실패한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거나, 용돈이 끊기는 것은 아니었다. 여진은 한편으로 그 사실이 조금 김빠진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역경과 고난이 필수이기 때문에…

여진은 말과 글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고, 모든 종류의 소통을 지겨웠했다. 오직 슬기와의 대화만이 예외였다. 여진은 슬기와의 대화를 믿었다. 그 안에 총체적인 진실이 있다고 확신했다.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모든 의도가 전달되는 완전한 대화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남들은 믿어지려나?’ 생각했다. 흔치 않은 관계를 소유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서 여진은 오직 슬기에게만 진짜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꺼내 놓고 보면 말이 약간 앞뒤가 안 맞는, 오직 머릿속에서만 말이 되는 그런 부류의 것들까지도. 그리고 그런 슬기가 자신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

어느 날 여진은 슬기에게 말했다.

“야. 노래 가사에 ‘청춘’ 들어가는 거 좀 짜치지 않아? 청춘 같은 일종의 ‘라벨’은 남이 그렇게 불러줄 때나 아름다운 거 아닌가? 당사자라면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응? 더 진짜 삶에 맞닿아있는 핍진한 묘사로 삶을 그려내야 좋은 글이고 가사지. 진짜 청춘은 그 단어를 안 써도 삶을 보면 안다고. 안 그래?”

“왜 너 그 가수 노래 좋아하잖아. 노래방에서 가사도 안 보고 부르더만.”

여진은 기본 안주로 나온 숙주 무침을 공연히 뒤적거렸다. 말을 꺼낸 걸 후회하는 모양새였다.

슬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긴. 부럽긴 하지. 사랑받는 대중가요 가사라는 게 보통 단순하잖아. 결과물만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고, 단어도 쉽고. ‘사랑’이니 ‘청춘’이니 하는 얘기를 골백번을 더 해도 아티스트만 바꿔가면서 히트를 치니까…. 왜, 요즘 글이 잘 안 써져?”

“… 웅. 사실 요즘 너무 힘들었더.”

“그래… 니 청춘도 멋져.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던 거 열심히 해.”

이런 식이었다. 슬기는 여진의 말 뒤에 자리한 진심을 부드럽게 짚어낼 줄 알았다. 속이 단단히 꼬인 여진에게 주어진 한 줌 신의 자비라고나 할까. 여진은 슬기가 행간을 읽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슬기는 역시 대충 얘기해도 누구 이야기인지 알아듣는구나. 정말 그 사람 노래가 싫은 게 아니라, 또래의 일원이 그렇게 잘 나가는 게 부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것까지도…’

슬기가 완전히 잠적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슬기는 간혹 지인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한 구석에 얼굴을 비추곤 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 근사한 카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 속 슬기는 웃고 있었다. 계정도 새로 만든 것 같았다. 그래서 여진은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마다 일기장을 펼쳐 슬기에게 편지를 썼다. 여진은 글자를 꾹꾹 눌러쓰며 이러고 있는 자신이 참 못났다고, 소름 돋게 음침하다고 자책했다.

*

사건은 여진이 진탕 취한 어느 새벽에 터졌다. 대학 동기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주 한 병을 산 것이 화근이었을까. 여진은 이미 매운 닭발에 소맥을 말아 한참 마신 뒤였지만, 무리와 헤어지고 나서 취하고 싶은 기분이 더 맹렬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에 오는 길에 여진은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다 슬기의 근황을 또 발견했다. 혜정이 올린 사진에 태그된 모습이었다. 여진은 거의 울부짖었다. “내 친구… 내 슬기… 슬기야….”

여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기장을 펴고 슬기를 향한 편지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소주를 비워갈 때마다 문장이 술술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진을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기장과 핸드폰, 핸드폰 충전기와 뒤엉킨 채. 핸드폰에서는 단순한 음악과 AI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튜브를 보다 잠들었나 보다’ 여진은 생각했다.

핸드폰엔 평소보다 많은 알람이 쌓여있었다. 화면을 들여다본 여진은 눈을 벅벅 비비더니, 이내 핸드폰을 내던지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너 슬기랑 싸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 진심?’

‘여진아 너 많이 취했어???’

‘야 김여진 전화 좀 받아!!!!!!’

친구들의 디엠이 일제히 가리킨 곳에 여진의 게시물 하나가 있었다. 또렷하게 일기장을 찍은 사진. 여진이 슬기에게 쓴 편지가 아주 버젓이, 선명히, 모두가 볼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올라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좋아요'도 눌려있고... 코멘트가 더 가관이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슬기랑 연락되는 사람’

알림창을 더 넘기자, 그토록 기다리던 슬기의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망할 미리보기 기능 좀 꺼둘걸. 여진은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없이 문자 내용을 마주하고 말았다.

‘여진아… 제발 철 좀 들어’

슬기의 문자는 꽤 길게 이어졌다. 문자를 다 읽은 여진은 그 길로 게시물을 지우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활성화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내리고 앱을 지웠다. 그 모든,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경로를 닫아걸었다. 그리고 곱씹었다, ‘철’이라는 말을.

‘잠수 타서 미안해. 내가 솔직하게 말했어야 하는 건데, 나도 그게 어려웠어. 네가 그렇게 힘들어할 줄은… 근데 솔직히 여진아, 저 편지가 나를 위한 건 아니잖아. 네 일렁이는 감정을 전시하고 싶었을 뿐이지. 너는 늘 네가 나를, 글을, 세상을 짝사랑한다고 불만이지만… 잘 생각해 봐 네가 진짜로 신경 쓰는 건 너 자신 뿐이야. 가능하다면, 너를 좀 덜 사랑해 봐. 아, 그리고 이사는 당연히 너랑 관련 없어. 부모님이 결정하신 일이니까... 난 너 미워하지 않아. 네 눈빛을 가끔 참을 수 없었을 뿐이야. 그러니 너무 속상해 말고 잘 지내.’

한참을 울던 여진은 배가 고파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생각했다. 나 지금… 꽤 근사한 시련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 경험을 꼭 글로 써야지. 일단 밥부터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