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연은 파란 이불에 몸이 감긴 채로 눈을 떴다.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언제 잠에 들어버렸는지, 언제부터 다연에게 이렇게 새파랗고 매끈한 이불이 있었는지도. 주변을 둘러보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코가 물에 잠겼다. 아, 다연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콧잔등 너머 보인 파란 빛깔은 이불의 것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촉감에 속아 일렁이는 물살을 이불로 착각한 거였다. 다연은 어딘지 모를 깊은 물 속에 있었다. 커다란 수조 안, 남해 바다 한가운데, 혹은 방류된 폐수가 흐르는 하천, 그 중 어딘가. 그렇다면 다연은 이곳이 이왕이면 맑고 파란 바다이길 바랐다.

 언제나 무언가를 애정하면서도 어딘가에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꼭 남겨두는 건 다연의 오랜 습관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다연은 바다를 유난히 사랑했다. 노을을 담은 물결, 뜨거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거품, 평안하다가도 잔뜩 성을 내는, 그토록 변덕에 취약한 바다를 다연은 미워한 적 없다. 무엇보다 바다 옆을 거닐 때 사람들이 조금은 더 다정해지고 사랑스러워진다는 점이 참을 수 없이 좋았다. 그래서 다연은 바랐다. 내 마지막은, 부디 내가 사랑하는 곳에서.

 곧 맞게 될 죽음을 그새 받아들인 걸까, 다연은 허우적거리지도 숨을 몰아쉬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간신히 뜬 눈 틈새로 연약한 구름 덩이들이 보였다. 구름이 참 희고 빠르다, 다연은 서서히 가라앉는 와중에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했고 이내 고요 속에 얌전히 눈을 감았다. 다연은 눈을 감은 채로 얼마 전 먹은 치즈 테린느를 떠올렸다. 죽음을 앞둔 와중에 떠오른 게 치즈 테린느라니. 어쩌면 숨이 멎기 전 가장 원초적인 행복의 순간을 떠올린 건지 몰랐다.

 그 치즈 테린느는 바삭한 치즈 케이크 같기도 하고 말랑한 푸딩 같기도 했다. 퐁실퐁실한 식감은 은빛 디저트용 스푼에 눌러붙은 작은 파편까지도 핥아먹고 싶게 만들었다. 대충 씹어 삼켜도 부드럽게 몸을 타고 내려가는 테린느 조각에 다연의 뒤틀린 속까지도 물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것을 다연은 담담하게, 그리고 끈끈하게 사랑했다. 작은 것에 온 마음으로 행복할 때. 치즈 테린느 한 숟갈에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나는 결국 이렇게 되었어.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어느덧 참지 않는 행복이 되고, 나는 이제 조금은 더 단단해진 거야. 헛된 기억들에 힘없이 무너져도 어찌 되었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육을 가진 어른이 된 거야. 치즈 테린느 조각에 행복할 수 있는 내가 됐어, 그런 생각에 다연은 퍽 손쉽게 괜찮은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모든 게 참아지던 날들에는 많이 괴로웠다. 많이, 그것도 정말 많이. 고독과 공포를, 질긴 원망과 증오를 떠안았고, 무력감과 치졸함을 인내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다 보면, 내가 감내하는 것들에 내가 잡아먹히기 십상이었다. 자처한 그물망 안에서 다연은 몸부림조차 치지 않고 순순히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내내 눈을 감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내 인생이 아니야. 나는 만들어진 인생 안에 붙잡혔을 뿐이야. 나는 이제 이렇게 누워있을 거야, 영원히.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참아졌으니까. 삶을, 순간을, 풍경을. 거울 속의 나를. 단 한번도 애정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모든 게 쉬워졌다. 아쉬울 게 없었다.

 그새 거칠어진 물살에 다연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몸이 다 잠기기 직전에 다연은 잠깐 눈을 떴는데, 여전히 구름은 희고 예뻤다. 파도가 일렁이자 흔들리는 다연의 몸뚱이에 맞춰 구름이 꼭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예쁜 게 많을 텐데. 아름답고 귀중하고, 그러다 또 아프고, 그러다가도 금세 찾아오는 더 무르익은 행운의 순간들. 다연은 놓쳐버릴 무수한 삶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이제야 온 마음으로 속상해졌다.

 이제는 보드라운 치즈 테린느를 참을 수 없고, 눈이 편안한 초록 색채를 담은 풍경을 참을 수가 없고, 고소한 커피 향내와 포근한 이불가지 위에 발라당 누워 만끽하는 휴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손아귀 안에 나의 기다란 손가락이 접혀 들어가는 순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마침내 그렇게 되었는데, 나는 이제 죽어버렸네. 저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슬픔이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다연은 바다에 누워 온몸으로 슬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 다연을 와락 덮쳤다.

*

 다연은 엉엉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엔 노란 스트라이프 무늬 이불에 몸이 따스하게 감긴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본 거울 속 오늘 다연의 얼굴은 유난히도 어린 얼굴이었다. 다연은 담담하게 눈물을 닦아냈고 커튼을 걷어 아침 햇살을 잔뜩 맞았다. 앞으로 커튼을 열 때마다 수천 번 맞게 될 햇살과 새벽빛, 눈보라와 빗방울을 상상하며. 인생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애정하는 것들이 늘어나서, 감내하기 힘든 것들이 늘어나서, 이제는 정말 남은 여생을 사랑해볼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