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는

밥은 먹었냐

날이 어떻다

한강엔 온통 개뿐이다

같은 말을 하며 몸을 앞뒤로 서겅서겅 흔들어댔다

그런 기억들은 다 잊은 것처럼

다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자글거리는 주름으로

쪼글거리는 입으로

묻는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미워할수록

할매에게 그런 기억은 점점 옅어지는지 (그런 기억뿐인지, 나에 대한 기억도 함께인지)

날 보고

밥이나 먹자

밥이나 먹자

한다

그 얼굴에 침 뱉기가 어려워서

사실은 무서워서 침묵으로 겨우 일관하던 것이

이제야

이제서야

할매 얼굴에 드리운 낯선 노인의 그림자를 보고서야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아빠는

할매의 집 계약을 앞두고

불확실하면서도 확실한 미래를 얘기한다

그 시점은 모르지만 결국엔 일어날 뻔한 결말 같은 것.

꼭 그 얘기가 나한텐 마감 기한처럼 들려서

그 안에는 꼭 사과해라 하는 얘기처럼 들려서.

할매와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서야 땅을 치고 후회하는,

꺽꺽대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내가 눈에 선해서

잘해보려 하다가도

그 태연한 목소리와

그 평온한 얼굴과,

비참히 무너지던 어린 내가

먼발치서 지끈, 하고 떠오르면

고개를 다시 절레절레한다

뒤돌아 다시 이 악물고 다짐한다

내 세상에 이젠 할매는 없다 할매는 내 적이다

초등학생 시절

하교하는 내 뒤를 짓궂게 좇던 개구장이 녀석들을

할매는 무서운 목소리로 내쫓으면서도

손에는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쥐여 보냈다

우리집 귀한 아이스크림을 그 못된 녀석들에게 주는 게 아까워서

어김없이 아이스크림 봉지를 들고 나타난 할매를 미워하고,

그 못된 녀석들이 소문을 내

나는 엄마아빠가 아닌 할매와 가까운 애가 될까 두려워했으면서도,

할매는 여름이면

한쪽 팔에 나를 끼고

까닥까닥 밤새 부채를 움직였다

아침이면 머리 위로 고운 빗길 슥슥 그려내던 고운 손

입맛 없는 저녁이면 콩나물 무침에 계란 후라이, 김치를 넣고 슥슥 비비거나

잔치 국수가 싫다 투정하면 고추장 한 숟갈 휘휘 섞어 내어주던

그 손맛에 나는 비밀이 있다고

어른이 된 나를 울리는 비밀이 있다고.

명절이면

그 짠돌이 여사가

한글도 배운 적 없던 그 짠돌이 여사가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은행 봉투 위에 꼬부랑글씨로 적은

건강해라. 사랑한다. 내 보물이다 쓰인 봉투가

빳빳한 지폐 몇 장을 품고

손에 쥐어졌다

세월 앞에 잔뜩 쪼그라진 할매는

이제

하릴없이 느리게 동네를 산책하거나

짜파게티 반쪽을 아침으로 먹거나

티비를 틀어둔 채 잠들다가

현관 비밀번호를 까먹고

날짜를 더듬거리는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는 어디까지 기억할까

할머니는 어떻게 기억할까

그 기억은 꺼내 가고

이 기억은 풀풀 털어버리기를

할머니,

할머니가 너무 미웠는데 지금은 너무 미안해

그래서 미안할 때 떠나라고

그래야 내가 평생을 땅을 치고 후회할 테니까

그래야 내가 평생을 그 은혜 버린 거 애타게 헤맬 테니까

지금 떠나주라

지금이면 내가 덜 아프겠어

더 이상은 망가지지 말고

나의 억척스런 슈퍼맨으로 남아,

사랑하는 할매

우리 할매